혼자서 굳건하게 서기
회사에서 재테크 동호회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
운영 목적은 단순했다. 회원분들이 각자 자신만의 기준을 잡고, 그 기준대로 투자해서 초기 시드와 함께 자산을 이루어 가셨으면 했다.
그래서 종목을 추천하는 모임으로는 만들지 않으려 했다. 누가 무엇을 샀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모임은 금방 그쪽으로 기운다. 좋은 정보를 먼저 아는 사람이 생기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투자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 1위는 남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공포탐욕지수가 그렇다. 모두가 환희에 차서 탐욕을 부릴 때 시장은 고점이고, 모두가 절망에 빠지는 공포에는 시장이 저점이다. 다들 아는 이야기인데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반대로 움직이게 된다.
지표는 숫자로 보이지만 그때의 공포와 탐욕은 숫자로 느껴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주변이 전부 사고 있을 때 혼자 가만히 있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고, 반대로 모두가 팔고 있을 때 혼자 사려고 하면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진다. 알고 있는 것과 그대로 행동하는 것은 역시 다른 일이었다.
남을 따라가는 건 나에게 그 행동의 이유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
내 판단으로 산 종목이 떨어지면 그래도 다시 들여다볼 근거가 있었다. 근거가 그대로면 버티면 되고, 틀렸으면 정리하면 된다. 어느 쪽이든 다음에 쓸 판단이 남았다. 그런데 남을 따라 산 종목이 떨어지면 내게 남은 건 저 사람이 샀다는 사실 하나뿐이라, 결국 다시 남을 보게 됐다. 저 사람은 팔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지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투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딱 그랬다. 회사 선배들이 좋다고 하던 종목들을 샀다. 삼성전자나 네이버처럼 누구나 아는 회사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본 해외 기업도 있었다. 그리고 계좌가 반 토막이 났다. 그 구간을 버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결국 전부 손절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 산 것들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면 평균 200%는 넘었을 것이다. 종목을 잘못 고른 게 아니었다. 내려가는 동안 붙잡을 근거가 나한테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살 때의 이유가 남에게 있었으니, 떨어질 때도 남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에게 기준점이 없으면 남에게 흔들리게 된다.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붙잡을 것이 없어서인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투자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다.
AI가 대중에게 점점 스며들면서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가치 판단마저 AI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보를 묻는 일과 판단을 맡기는 일은 다른 것 같다. 이 회사의 매출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묻는 건 정보라서 내가 확인할 수 있고 틀리면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회사를 사야 하는지 묻는 건 내 자산 규모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변동성, 이 돈이 언제 필요한지까지 들어가야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두 질문을 똑같이 한 문장으로 던질 수 있다 보니 경계가 쉽게 흐려지는 것 같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할 때 의존하는 부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정의하지 못하거나 행동의 의도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격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대상이 꼭 AI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항상 타인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SNS가 활성화되면서 타인의 범위도 매우 넓어졌다. 예전에는 비교 대상이 주변 몇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화면을 넘기는 만큼 늘어나고, 거기 올라오는 건 대개 누군가의 가장 좋은 순간이다. 내 하루 전부를 남의 제일 좋은 순간과 나란히 놓고 보게 되는 셈이다.
무언가의 기준이 외부로부터 설정되기 시작하면 끝을 잡을 수가 없다. 상대방에 비해 더 나은, 더 높은. 늘 그런 식이다. 기준이 상대적이면 도달점도 같이 움직여서, 올라가도 끝나지 않는다.
나도 화면 속의 타인이 항상 부러웠다. 긍정의 방향으로 비교하며 그 목표에 올라서도 또 다른 타인은 나보다 항상 높은 곳에 있었고, 그럼 나는 또 하염없이 부러워했다. 이게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뒤로 한동안은 비교 대신 나로부터 기준을 세우는 방법을 고민했다. 단순하게 숫자를 고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이루면 내가 행복해지는지까지 고민하며 비교군이 없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다.
결국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었는데, 그 질문이 제일 막막했다.
그런데 기준을 세운다는 것 자체부터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A와 B의 결정 지점에서부터, A와 B가 무엇인지 모르면 방향을 결정하기도 어렵다. 남이 정해준 선택지 중에 고르는 건 쉬운데 그 선택지가 애초에 맞는지 묻는 건 어려운 일이라, 둘은 난이도가 꽤 다르다고 느꼈다. 또한 A와 B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판단을 넘어 수많은 팩터와 함께 결정해야 한다면, 이제 하나의 기준을 위한 수많은 결정 중 하나의 판단을 위한 정의부터 탐구해야 한다. 기준 하나 세우려다 그 아래 숨어 있던 질문을 열 개쯤 만나게 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이게 비효율처럼 느껴졌다. 답 하나 내자고 왜 이렇게 멀리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그 질문들을 지나다 보니 아는 것이 늘어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성장의 기반이 수없이 펼쳐지고, 그 성장은 다음 기준과 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남이 준 답을 받으면 결과만 남지만 내가 세운 기준에는 과정이 같이 남아서, 그 차이가 다음 판단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 결정하다 보면 부족한 부분들이 식별되고 실수가 나기도 한다. 그럼 또 무엇이 문제였는지, 더 좋은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다시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이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내가 확인하는 일이라서, 남을 따라 했다면 저 사람 말이 틀렸네 하고 넘어갔을 일을 끝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담금질에 비유하곤 한다. 스스로에서부터 단단해진다는 뜻으로 쓰는 말인데, 담금질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달구고 식히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기준도 그런 것 같다. 한 번 세운 기준이 그대로 굳는 게 아니라 틀리고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해진다.
스스로에서부터 단단해진 본인만의 기준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 자체가 본인에게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남이 준 기준은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면 같이 무너지지만, 내가 세운 기준은 틀릴 수는 있어도 틀렸다는 판단까지 내가 한다.
동호회를 종목 추천 모임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던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좋은 종목을 알려드리는 건 그 순간에는 도움이 된다. 그런데 내려갈 때 붙잡을 근거까지 같이 드릴 수는 없다. 그건 각자 가지고 계셔야 하는 것이라서, 내가 드릴 수 있는 건 기준을 세워보시라는 말뿐이었다.
지금도 기준이 다 세워졌다고는 못 하겠다. 여전히 고치는 중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고칠 것 같다.
다만 하나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떨어지면 남을 먼저 찾아봤는데, 이제는 내가 왜 샀는지를 먼저 본다. 거기서 답이 나오면 버티고, 나오지 않으면 정리한다. 결과가 늘 좋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음에 쓸 판단이 남는다.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인으로부터 세운 목표를 달성하다 보면, 외부의 어떤 작용으로 흔들려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혼자서 굳건하게 선다는 건 아마 그런 뜻일 것이다.